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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raps(articles)
언론 보도
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신동아2007년6월호)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 선생님의 빅 히트곡인 ‘님은 먼 곳에’의 진짜 작사가가 누구인지를 두고 작사가 유호씨와 작곡가 신중현씨가 서로 자신이 작사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2심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심에선 유씨가 승소). 선생님도 증언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신중현 선생님이 (악보에) 4B 미술연필 같은 것으로 뭔가를 썼다는 기억만 나네요. 유호 선생님의 노랫말 글자 수가 많아서 신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신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과정은 못 봤어요. 다 된 것만 봤지. 그러니 잘 모르죠 뭐. 우리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됐으니까요.”
요즘 젊은 층에겐 조관우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 유명한 ‘님은 먼 곳에’는 1970년 동양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연속극 작가는 유호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이런 곡은 못 부르겠다”고 거절하면서 김추자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됐다. 데뷔 앨범(1969년)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종 가요상을 휩쓸던 김추자는 이 곡으로 스타의 입지를 완전하게 굳혔다. 그는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덩키스의 멤버로, 김추자의 히트곡 대부분은 신중현 작곡이다.
‘님은 먼 곳에’는 그 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가장 호응을 받고 있는 조관우조차 “김추자 선생님의 원곡을 따라갈 리메이크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김추자의 음색은 흉내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 워낙 히트를 하자 “리듬이 내게 맞지 않다”고 거절했던 패티 김도 후일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끼워 넣었다.
가사 중 특히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대목에서 ‘꿈도 주고’ 부분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추자의 터질 듯한 몸매와 겹쳐지며 ‘몸도 주고’로 야릇하게 개사돼 불렸다.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이 ‘달려라 허동구’ 후속 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도 ‘님은 먼 곳에’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1971년) 된 바 있다.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 ‘님은 먼 곳에’가 거의 연습 없이 녹음됐다면서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시간 연습하곤 그냥 녹음했지요. 일일연속극 첫 방영이 다음날이었는데 그 전날 노래를 녹음한 거예요. 오전 8시에 콜을 받고 운현궁 스튜디오에 가서 악보를 받은 뒤 11시에 연습과 녹음이 다 끝났으니까요.”
▼ 몇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빗속의 여인’ 앨범도 아침 10시에 모여서 11시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다시 연습 들어가서 4~5시에 녹음을 다 마쳤는데요 뭘. 그 앨범에 20곡가량이 들어갔는데 그걸 2시간 만에 다 녹음했으니까요. 연습은 거의 못 했죠.”
▼ ‘님은 먼 곳에’를 리메이크한 가수가 많은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 다르니 어떻게 평을 하겠어요. 어떤 가수든지 곡을 받고 나면 자기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부르니까 말입니다.”
판소리+솔+사이키델릭
김추자는 2000년대 들어 7080세대 음악의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도 지금껏 TV 브라운관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형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다. 김추자 음반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이제 딱 두 사람 남았다. ‘그리운 사람끼리’ ‘목마와 숙녀’를 부른 박인희와 김추자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추자의 족적은 박인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관중을 압도하는 김추자의 현란한 춤사위와 섹시한 의상을 먼저 논하겠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창법부터 30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구성지면서도 시원스레 탁 트였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은 당시 전위 음악의 장르였던 사이키델릭 음악에 흑인의 한(恨)이 배어나는 솔을 합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성씨는 한을 내뱉는 듯 구성지면서 한편으론 탁 트인 김추자 노래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핫팬츠, 모자, 무릎 아래 리본 차림이다. 의상 설정이 놀랍다.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김추자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판소리나 창을 딱히 어디에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웬만한 노래는 몇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수심가’인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상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제가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국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궁중무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천흥 선생의 초대로 탈춤공연을 한 적도 있죠.”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反戰)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김추자를 두고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부적 재능
사이키델릭과 솔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가수는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추자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를 보였다. 1951년 춘천의 딸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무용학원), 노래학원(개나리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가다듬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김추자의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공부, 노래, 춤,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했으니 춘천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춘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모델이 돼달라고 해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추자 왔다’며 환호해 부끄러워 혼났다”고 한다.
▼ 고교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군요.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처음엔 미대에 가려고 했지요. 대학교수로부터 데생과 구상을 중심으로 레슨도 받고 실습도 열심히 했는데, 실기시험은 합격했지만 필기에서 떨어졌어요. 당시 동국대가 2차라, 그래도 예술 분야를 선택한다는 게 연극영화과였어요.”
▼ 가수가 된 건 어떤 계기였습니까. 신중현 사단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갔고요. 대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게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신 선생님 매니저이던 맹승호씨가 제 형부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 소개로 가게 됐어요. 그때 신 선생님은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대형 가수들과 작업하느라 매우 바빴어요. 그냥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죠. 그 자리에선 별말씀이 없었는데 며칠 후 ‘늦기 전에’라는 곡을 툭 던져주셨어요.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죠. 선생님이 저를 무척 잘 본 모양이에요.”
결국 ‘늦기 전에’는 그의 데뷔곡이 됐다.
▼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 배우던 얘기 좀 해주세요.
“신 선생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춰 노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 거지요. 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이죠. 사이키델릭이나 솔 창법도 신 선생님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 천부적 소질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아버지가 창도 잘하시고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하셨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하셨어요.”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때로는 ‘솔직한 아부’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법. 이번에는 기자의 경험담으로 이야기의 끈을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의 어조는 딱 부러졌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인터뷰가 계속됐다.
▼ 어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님은 먼 곳에’와 ‘봄비’를 불렀습니다.
“오! 그래요. 스케일이 아주 크군요.”
▼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아마 제 술친구들은 ‘내가 김추자와 얘기를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군요. 정 저를 만나기 싫으면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시죠.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방송 보도국인가에서 5분 뉴스에 잠깐만 녹음을 해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언론 때문에)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입도 감옥살이, 몸도 감옥살이.”
▼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듣는데요.
“그렇더라고요. 대개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그러더라고요. 속도 여리고 그런 경향이 있죠.”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김추자의 노래를 널리 좋아했던 것은 그의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김추자의 음악은 7080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인가가 돼 있었다.
▼ 인터넷에 있는 선생님의 팬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팬들이 선생님에게 정기모임에 꼭 한번 나와달랍니다.
“알아요. 회원분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늘 고맙지요. 저도 잠깐씩 들어가 보곤 하는데, 제가 닉네임을 써서 들어가는데도 귀신같이 다 알아요. 카페 회원 중에는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지켜보는지, 정원에 목련이 폈다 뭐가 어떻다 아주 유리문 들여다보듯,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카페 회원들을 취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아이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도 거기 가입돼 있어요. 그 선생님이 처음엔 제가 누구인지 몰랐죠. 아무개 엄마로만 알았지. 나중엔 이런저런 것을 다 상의할 만큼 친해졌지만 제가 김추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영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겨울 그는 다음 카페의 김추자 팬 모임인 ‘김추자 forever(cafe.daum. net/kimchooja)’에 자신의 옛 사진들을 공개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같이 언론매체에서 보지 못한 개인적인 사진들이었다. 카페지기 남종근(53)씨는 “2004년 4월 정기모임을 할 때 김추자씨는 오지 않고 남편인 박 교수가 꽃과 와인, 케이크, 카드 메시지를 들고 왔다”며 “처음에는 퀵 서비스 직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 교수였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 카페 운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이버에도 김추자의 팬 카페(cafe. naver.com/chooja)가 있다. 네이버 팬 카페는 다음 카페와 달리 김추자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한 30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음악적 색채가 짙다. 이곳에는 전문 뮤지션도 많이 속해 있다. 카페지기 김모씨는 “지난해 모임에 김추자 선생이 와인 7병과 카드를 보내왔다. 회원들 중에는 처음엔 신중현의 음악에 심취하다 김추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카페 회원들은 “김추자 선생이 다시 음반을 낸다면 젊은이들에게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의 음악은 너무나 신선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신선하다”니.
‘70년대의 효리’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 요즘 젊은 세대들도 김추자 선생님의 노래, 춤, 의상 등 모든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으니까 그렇겠지, 하하하. 내 노래가 왜 좋은가 하면…. 다른 좋은 가수도 많지만 순수함과 세련됨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을 입어야 꼭 세련된 건 아니잖아요. 화장을 안 하고 자연스럽게,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리는 것, 그러면서도 멋이 풍기는 것, 그런 게 세련된 거지. 난 뭘 바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음악도 그래야 제대로 나오지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음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지요.”
기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후반, 교실에서, 또는 소풍 가서 벌어지는 장기자랑의 주메뉴는 노래와 춤이었다. 열 중 아홉은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다.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의 춤도 따라 췄다. 007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손 모양과 비슷한 손가락 춤(이은하의 ‘찌르기 디스코’의 원조)이 그것이다. 골반을 묘하게 뒤흔들며 추는 춤은 내 아버지 세대에게는 수컷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꼬맹이들에겐 또래 속 인기관리 수단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세상 말세’라며 혀를 찼다.
어깨와 손, 골반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추자의 춤은 그에게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별칭을 안겼다. 관능적인 골반춤은 뭇 남성의 가슴을 ‘폭파’시켰다. 그래서 붙은 김추자의 별명이 ‘다이너마이트’다. 요즘 안무가들은 격렬하고 과격한 그의 춤 동작을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이효리가 추는 춤과 흡사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방송사가 대역을 시켜 김추자의 춤을 이효리의 ‘애니클럽’에 맞춰 다시 추게 해봤는데 전혀 무리 없이 잘 맞아 들어갔다.
과거에도 이금희나 펄시스터즈와 같이 노래를 부를 때 춤을 가미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추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이들의 것은 단지 율동일 뿐 노래와 하나 된 춤이 아니었다. 김추자에게 춤과 노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작곡가 신중현은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춘천여고 시절 응원단장을 지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또 어떤가.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몸이 터져라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1970년대의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간첩說의 진상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김추자는 이른바 그 전위적인 춤 동작 때문에 난데 없는 간첩설(說)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짓말이야’(1971년)를 부를 때 선보인 특유의 손짓이 ‘북한과의 수신호’라며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거짓말이야’라는 제목 자체가 유신정권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고 있던 터에 이런저런 이유로 스케줄에 줄줄이 펑크가 나면서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 어쩌다 간첩으로까지 몰리게 됐습니까.
“저는 음악이 주어지면 그때마다 동작이 저절로 나와 거기에 맞추거든요. 그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저더러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거든요.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청와대에서 부른 것과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팍팍 올라가던 저를 꺾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죠. 복합적인 이유로 저를 매장시키려 한 것이겠죠.”
▼ 청와대 제의를 거절해서 이른바 괘씸죄에 걸렸다는 뜻인가요.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가수가 중앙정보부 파티에 불려갔었죠. 1971~72년 언저리쯤입니다. 재벌회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 ‘저무는 바닷가’ 노래를 촬영하러 바닷가 인근의 컨트리클럽에 갔을 때는 녹화 도중에 모 언론사 사장이 밥을 먹자고 해서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블랙리스트 올라
 
1971년의 김추자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誤報)가 되고 말았네요.
“만회해야지요 뭐. 그때 (음반을 내기 위해)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지요.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 그런데 왜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남편이 세종문화회관엘 갔는데, 글쎄 제가 그쪽 대관(貸館) 부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음반을 내기로 한 기획자를 비롯해서 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공연을 한다며 대관신청을 마구 해놓은 거예요. 그것도 골든타임에. 저는 동의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공연은 펑크가 났겠죠. 영문을 모르는 회관측에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거고요.”
▼ 음반을 내겠다고 했으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작곡가가 대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2~3명만 곡을 잘 뽑아냈으면 됐는데…. 이름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마음을 많이 썼는데….”
김추자 LP음반, 최고 호가 300만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속의 여인’ ‘비련’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이에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 테니까.”
중고 LP음반 경매시장에서 김추자의 중 희소가치가 있는 음반은 30만원에서 300만원을 호가한다. 그는 1969년 데뷔 앨범 발표 이후 2년 동안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아마 국내 가수 중 해적판 음반이 가장 많이 나온 이도 김추자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공식적인 가수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앨범업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판을 내고 싶어했다. 해적판도 보관상태만 좋으면 경매시장에선 비싼 값으로 낙찰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1971년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이 탄생했는데, 1호 음반의 주인공 역시 김추자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김추자 음반을 40여 장 소장하고 있지만 제일 비싼 것은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잡고 있는 재킷 사진이 실린 음반이다. 그건 내게 없는데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추자가 전부 몇 장의 앨범을 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김추자의 음반 재킷 중에도 쇼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최씨가 소유한 음반 중에는 남성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재킷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넣은 것과 성적으로 절정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을 담았다고 해 ‘섹스신 음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추자 LP를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신동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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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20. 김추자 [중앙일보] 2006.1.27. 드라마 주제가 ‘님은 먼곳에’ 패티 김이 펑크 내 대신 불러 가수 지망생 김추자가 찾아왔지만 막상 오디션을 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난 김상희의 음반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김추자에게 말했다."지금 하는 음반 작업..
2005-09-22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19) 추자의 전성시대 (신현준:한겨레신문)
 구미의 대중음악을 논하는 문헌을 보면 1960년대는 ‘좋은 시절’이었던 반면, 70년대는 ‘그저 그런 시절’이었다는 식의 평이 심심찮게 나온다. 경험과 실감도 부족하니 논평은 삼가자. 그런데 되돌아보면 한국에서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시절 다 갔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60년대 말까지 ..
2005-04-21 김추자,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의 연인 (최지선:컬쳐뉴스)
     최지선의 여성음악인 열전   김추자,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의 연인 소울․사이키 사운드의 ‘대중적’ 완성의 정점   2005-04-21 오후 2:11:38  최지선 _ 대중음악평론가]    &n..
2004-11-13 '무등산 타잔' '김추자' 등 실존 인물 영화 제작 붐 (조이뉴스24)
 조이뉴스24 | 기사입력 2004-11-13 14:53   무등산 타잔 박흥숙, 가수 김추자 등 실제 인물들의 삶이 영화로 속속 제작되고 있다. 이처럼 실제 인물들을 다룬 영화가 잇따라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꾸미지 않은 강력한 드라마가 매력적이며 그들의 인지도가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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