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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
대형가수 김추자論 (이만재:엘레강스78년6월호)

저 끝나지 않은 오기와 비통의 노래

 

「돌아온 金秋子」

  김추자가 돌아온다.
  검붉은 정열의 화신(化身), 마(魔)의 소울싱어 김추자가 지평선의 회오리바람처럼 다시 돌아온다.
  70년대 초반 우리나라 연예계를 그 독특한 반역의 정염으로 풍미하면서 잠자는 돌부처까지도 술렁이게 만들었던, 위대한 말괄량이, 엔터테이너 김추자가 긴긴 3년 동안 부러진 날개깃털 다시 가다듬어 멍든 가슴 울멍이며 검은 눈 깊이 내려 깔고 장고처럼 돌아온다.
 「성님」들이 모두 하루 아침에 거세당한 후 올망졸망 신인들이 신났던 영욕의 황야로 「추자는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가-」 마지막 승부를 묻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긴 잠에서 마녀는 이제 깨어났다.
 

 아직은 부분 해제의 몸이지만 김추자는 김추자.
  오히려 지금은 맵고 짠 인생 진국, 더욱 덥게 끓여져 병기(兵器)로 치면 반질반질 검은 윤기를 더한 셈일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축적된 스테미너가 또한 묵중한 양감(量感)으로 도화선에 연결되어 팬들의 관심과 흥행사들의 군침과 그리고 5월에 있을 그의 재기 무대를 함께 엮고 있는 참이다. 도화선은 다시 불붙을 수 있을 것인가.
  불사신의 저녁으로 이제 다시금 연예계를 조바스럽게 긴장시키는 이 소문난 여자, 김추자는 대체 누구인가?


  대중들의 새 노래 반백년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가수들이 저마다의 목청을 돋우며 파란도 많은 명멸부침을 거듭하여 왔지만 적어도 필자가 가늠하게 하는 한에서는 그 개별적인 이미지에 있어서 김추자만큼 진한 냄새와 강한 칼라로 대중관심 속에 획을 그었던 여자가 더 있을성 싶지 않다.
  여자노래라고 하면 으례 가냘픈 목소리로 드레스 자락을 하늘거리며 애틋한 사랑사연이나 하소연 하는 것으로 알았던 때, 이게 무슨 망측스런 변일지, 못보던 웬 신인이 터질 것 같은 몸매에 팽팽항 바지를 꼬여 입고, 머리칼을 온통 한 때의 먹구름인 양 보클려 갖고, 어디 그 뿐인가, 오장육부를 훑는 듯한 기괴한 사이키 음향과 가슴 우물 속 열길 암흑 속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허스키를 한데 몰고 우리들 앞에 점령군처럼 나타났을 때, 그 최초의 쇼크는 거의 선혈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반 세기나 변함 없던 스테이지 매너에 최초로 파격의 관능을 도입한 이 별난 가수 김추자는,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라 노래를 화염으로 불뿜어 뽕짝 일변도이던 침체된 대중들의 가요감성에 화려한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 분야 정상을 장악하는데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슬로 소울은 그의 스승이며 그에게 리듬의 마성(魔性)을 주입시킨 천재 연주가 신중현의 싸운드와 함께 충돌하면서 고루하게 응집된 관중들의 가슴을 치고 봇물을 터뜨리듯 환호를 끌어 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1970년 서울 시민회관, 신중현 리싸이틀에서 그 그룹 「비장의 신무기」답게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 추자는 일거에 대형스타로 뛰어 올라 데뷰 첫 곡인 「늦기 전에」를 히트시키고 1973년과 74년 리싸이틀을 통해 그 절정의 인기를 확인하면서 75년 12월 5일 마리화나 흡연 관련사범으로 일거에 몰락할 때까지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거짓말이야」, 「무인도」 등 3백여곡의 「김추자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추자는 가수이므로 얘기하자면 먼저 그의 노래를 정확히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노래를 활자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 노래 가사를 옮겨 적을 것인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 가사의 단어들이 지니는 뜻은 김추자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못된다. 애초부터 그것들은 김추자를 위한 것이거나 김추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단어들이라면, 몇십원만 주고도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노래책이나 변두리 여관방의 담벼락 낙서가운데도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사 대신 악보를 적어서도 안된다. 악보대로라면 굳이 김추자를 동원하지 않고 다를 가수나 또는 악기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연주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악보도 가사도 결국 김추자의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를 귀로 듣거나 눈으로 읽을 수 없다.
  우리는 김추자의 노래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추자, 그 여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격정과 만나지 않고서는 적어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김추자의 독특한 개성을 지적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예로 들 수 있는 노래 중에 「커피 한 잔」이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는 김추자 이전 다른 가수자매가 한 번 불렀던 적이 있는 것을 그가 다시 리바이벌한 곡인데 그 둘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김추자가 단순히 겉 멋 부리는 기교파 가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쩔 도리 없이 인정하게 된다.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성대나 감정으로 소화시키는 편이라고 한다면 추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곡과 가사를 제 노래의 기름(油)으로 완전히 녹인 다음, 그것을 온 몸에 들어부어서 타고난 천부의 열정으로 활화산처럼 점화시키는 쪽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음소리같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불타는 영혼의 유황냄새로 가슴이 저리는 것이다. 그는 관중을 향해 애소(哀訴)하지 않는다. 신파조의 눈물이나 아픔을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내공으로 향한 신음소리는 마치 밤안개 속의 기적처럼 어느 것 하나씩은 모두 잃고 사는 우리들 가슴 속 허무의 벽에 와 닿는다. 가수 김추자가 비싼 것은 그 허무의 벽이 위치해 있는 지점의 차원에서 그 인기의 값이 정해진 까닭이다.

셀라시에 황제와 울보

  김추자, 본명.
  6 25 전쟁의 와중이던 1951년 춘천에서 났다. 딸만 넷이던 집에 또 하나의 딸로 막내가 된 추자는, 고집불통, 울보에 엄마 젖을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빨았노라고, 스물 여덟 살이 된 지금 「끌끌끌...」 웃으며 어린 시절을 술회한다.
  「하하하...」 또는 「후후훗...」 웃을 여자로 알고 만났는데 추자는 계란빵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뺨과 쌍커플 수술자국으로 씰룩이며, 「끌끌끌...」 웃는다.
  얘기의 말 끝마다 김추자는 「끌끌끌...」 웃었다.

  아버지는 추자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다행히 딸을 많이 두고 가셨으므로 왈가닥 다섯 공주님을 키워낸 홀어머니가 큰 고생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은 논, 밭, 과수원의 형태로 아직껏 4만평이나 남아있어 지난 3년 동안도 그 농장 수익 가지고 버틸 수가 있었다.
  젖먹이 때 유별나게도 많이 울어서인지 추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하는 종달새로 전교에서 유몀하였다.
  노래 뿐만이 아니라 무용이나 운동에도 출중한 소질을 발휘, 춘천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대항 행사가 있으면 무슨 행사에고 감초처럼 뽑혔고 셀라시에 에디오피아 황제가 내한하여 춘천을 방문하였을 때는 황제님 목에 꽃둘레를 걸어드렸다.

  혈액형 B형을 타고난 계집아이답게 샘이 많아 공부마저 열심히 하였으므로 12년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 콧대를 높여 마지 않았다.
  공부 잘하고 무용 잘하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추자씨」의 뒤엔 늘 여드름 머스마들이 쭈볏거리며 따라 다녔으나 워낙이 도도한 「추자씨」 였으므로 감히 정면에 나서 말을 붙여보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여러 자기 학과를 두루두루 잘 해내자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그러면서도 공부방은 미래의 가수 김추자의 환상으로만 가득 차 한 밤중에도 FM에서 좋은 음악만 흘러 나오면 혼자서 신들린 무당이 되어 춤추고 노래하고 미쳐 울었다.
  아, 이 대목에서 김추자는 처음으로 「훗훗훗...」 하고 처녀웃음을 웃었다.
  꿈 많은 여고시절의 추억은 역시 백전노장의 갑옷도 말랑말랑하게 녹이는가 보다.

  추자가 처음 상경한 것은 1969년도 행복하고 행복했던 여고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행 열처에 몸을 실으므로써였다.
  전공과목 선택에 무진 애를 먹었는데 아무 걸 선택해도 자신은 있었으나 뭔가 막연히 자기가 남들처럼 평범한 팔로로 태어난 계집아이는 아닌 것 같다는 운명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은 앞서의 예감과 그리고 그 예감 뒤를 따르는 다소는 낭만적인 「끼」의 자신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는데 아뭏든 이 대학생활은 2년을 못넘기고 끝장이 났다.

  신입생 환영을 뜻하는 교내 노래자랑 대회에 나아가 심사위원 전원, 방청 학생전원 만장일치로 당당 1등을 해 낸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신입생 김추자는 금새 교내 명물이 되었고 그 소문이 인연이 되어 마침내 김추자는 신중현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중현의 등장은 김추자의 반생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자음악과 무그의 기인으로 알려진 그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경음악 수입의 관문이 되고 있었던 미8군 무대에 진출하여 재즈와 록큰롤로 크게 인정을 받으면서 국내 악단에서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연주가로 성가를 높이는 한편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도입한 특징적인 작품 활동으로 음악의 새 물결에 민간함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창법의 구습을 못 벗어나는 가수들에게 실망하고 있던 신중현에게 김추자는 적격의 신선한 머티리얼 이었다.
  165cm의 훤칠한 체격, 민감한 음악성, 풍부한 성량, 낮은 B에서 높은 C까지 자유자래로 구사하는 육감적인 음폭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데뷰곡이자 출세곡인 「늦기전에」를 신중현으로부터 받았다. 이 때 추자 나이 갓 스물, 영광과 오욕과 환희와 절망이 간단없이 교차되는 쇼 비지네스 세계의 새로운 세월 앞에 마침내 마주 서게 된 것이다.
  All or Nothing.- 이것은 김추자의 성격이다.   새롭게 전개된 세월 앞에 그는 모든 것을 다 투척했다.

절대음에의 탐구

  스무 살 소녀의 오색빛깔 꿈과 그 꿈 속에서 반짝이던 대학교의 뺏지와 그리고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딸의 걸어왔던 가족들의 분분한 기대까지도 몽땅 빼앗긴 숙명의 행로, 운명의 리듬 앞에 모두 바쳤다. 골백번 죽고 또 죽어도 이제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을 성녀로 승화시켜 가질 수 있다는 왕성한 확신은 그가 김추자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사에 냉정한 그였지만 그의 독특한 점은 그가 한 번 결심하였을 때 자기 자신까지도 냉정히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소녀의 꿈, 꿈의 베일을 모두 벗어 내버린 순간 정말로 그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화신이 되었다.

  바람직한 사회란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의 개개인이 열성적이고 성실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몸을 아끼지 않을 때 기틀이 마련된다.
  전문직의 기능이 숭상되는 나라일수록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그런 사회일수록 우수한 정치인과 우수한 상인과 우수한 학자와 우수한 구두수선공들이 배출되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모두 정치가나 승려가 되어서는 안 되듯이 세상의 여자들도 모두 가수나 배우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짓을 자기 직능으로 택했다면 당연히 목숨까지도 내걸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쇼 걸의 길을 택한 김추자는 정말 쇼 걸 김추자로 다시 태어났고 그리고 마녀가 되었다.
  연예계,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비정한 프로패셔널의 세계인가.
  그 분야에서 그 나름의 도를 터득하기까지 그가 남 몰래 흘린 눈물의 댓가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못한다. 그가 흘린 땀의 분량도 추자 말고는 아무도 감량하지 못한다.
  다만 김추자에게 있어 무대는, 마녀가 혼신을 부르는 재단이었다고 모든 청중들도 그렇게 믿었다.

  청중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쑤시고 터뜨려 쇼무대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수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런데 김추자, 그렇게 마녀처럼 노래의 혼으로 부르다보면 웃을 때 「끌끌끌...」하는 소리가 나게 되는가?
  「끌끌끌...」에서는 어쩐지 박복한 여인의 체념냄새가 나는데.
  그렇다. 이제 따지자면 스물여덟살난 여자이면서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 본 다른 여자의 여러 몫, 신고(辛苦)가 김추자에게는 따랐던 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72년도에 일어났다. 본인은 그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눈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던 「김추자 난자 상해사건」의 충격을 그를 아끼는 많은 팬들은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얼굴의 형태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중태에 빠진 김추자가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갖지 못했다.
  3회에 걸친 안면부 복원 대수술을 포함한 생과 사의 만 1년 동안 그는 그 누구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생을 끌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침묵으로 투시하면서 이제 자신에게 자신의 소유로 남은 유일한 것, 그것이 노래라는 사실을 피가 마르도록 애타게 되씹었다. 암흑 속에서 그는 혼자였으며 그 모습은 바로 자기의 노래인 것을 보았다.

  「불행한 사고였지만 나에게는 인간적 성장의 한 계기였다. 한 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릴 적 꿈대로 천사가 되고 싶었던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만 있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철이 들었다. 하늘의 천사보다 땅 위의 천사들을 먼저 배워야 하늘의 천사도 될 수 있다는 이치가 조금씩 조금씩 내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아마 정확할 것이다. 그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1년 뒤에는 분연히 신장개업(?)을 하고 일어나 김추자는 「여자」가 아니라 「가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팬들을 믿었듯이 팬들도 그를 버리지 않아 그가 첫번째 재기한 73년과 그 이듬해의 리사이틀을 성공시켰다.
  상해사건으로 인해 그의 사생활 일부가 노출되자 힐난의 눈초리로 그를 경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의 불운을 동정하고 그의 처절한 새출발을 장하게 여기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실제로 그가 다시 무대에 나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거짓말...」하고 노래를 부를 때면 추자가 제 맘 속의 아픔을 고백하누나 싶어 안스러운 표정들로 공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직 얼굴 표정의 컨디션이 전과 같지 않음에도 김추자의 스케쥴은 전 보다 더 바빴다. 레코드 취입, 방송 출연, 무대 공연 등으로 3백 65일 중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역경을 넘어서 재기의 보람을 주신 신에게 그는 감사하였다.

  그러나 75년 겨울 어느 날 새벽 몇 사람의 낯선 남자들이 김추자를 방문함으로써 재기의 날개는 뿌리채 뽑혀져 추자 시대의 막을 내렸다.
  낯선 남자들은 집 안을 온통 뒤진 끝에 「대마초 관련」의 증거를 발견해냈던 것이다. 일부 연예인들간에 한창 유행하던 것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집안에 놔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나 당시의 시국상황으로서는 「연예계풍토 정화」라는 일차적인 사회적 요구가 중요한 때였다. 김추자는 그 날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서글퍼서 20일을 울다가 「가수활동 전면 중지」의 처분을 받고 창백한 얼굴로 풀려 나왔다. 영하의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것이다. 웬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면서 잠긴 목에서는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 「끌끌끌...」, 회한의 자조음이 끓어 올라왔다. 자신도 처음 듣는 그런 소리였다.
  
추자혼을 남기려고

  은연자중 3년 동안 추자는 거의 두문불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 가끔씩 「단칸 전세방에 냉장고 하나 쌀통 하나 놓고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너무 부러워」 그런 서울 변두리에 사는 옛 친구들을 찾아 조용조용한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 중의 낙이었다. 자기보다 못해 보이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었던가 하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3년이었노라고 이제 김추자는 말한다. 어른이 된 것이다.

  「한 때는 원망스럽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포자기를 할 뻔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더욱 강한 여자가 된 것 같고, 이제나마 다시 삶의 의미를 되돌려 준 당국의 조치를 감사히 생각한다. 새 출발하는 새 무대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 달라. 노래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노래를 버릴 수 없다.」
  김추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스카알렛 오하라처럼 고난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남아 다시 우뚝 일어섰다. 웬만한 불운쯤이라면 이제 그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버티고 서서 혼신의 힘으로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분산된 「김추자의 영혼」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다. 재기 공연을 기하여 신중현과 다시 뭉친다.
  

 이만재

 1978.6월호

 엘레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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