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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
그리하여 '님은 먼 곳에'는 끝났다 (김추자:엘레강스80년7월호)

  글 : 김추자

 

  오랫만의 외출을 기다리듯 가슴은 가벼운 흥분으로 설레인다. 그 숱한 무대공연과 방송출연의 경험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나를 만들었으리라 믿었었는데. 아니다 지금의 나는 커다란 리사이틀을 앞두었을 때나, 오랫만에 방송 출연요청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절부절 못하고 긴장되어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언니들은 '귀여운 새댁'이라고 놀려서 나는 또 한번 얼굴을 붉힌다.
  참 이상하다. 강렬한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가 비좁다 활보를 할 때, 하루가 멀다하고 매스콤에서 나의 노래가 쏟아져 나올 때 나는 모두가 갖는 것, 모두가 가는 평범한 길에는 결코 짜릿한 흥분이나 행복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행복은 남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갖고 남보다 뛰어나고 남보다 성공하는데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평범한 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행복에 취해 있고 흥분에 들떠있다. '꽃답다'고 말하는 20대가 다 지난 지금에 와서 나는 '내 일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때'임을 비로소 느끼고 있다.

  우리가 결혼발표를 한 며칠 후 E여대에 다니는 조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오며 나를 찾았다.
  "이모, 이모! 오늘 집에 오는 버스 속에서 말이야. 웃기는 일이 있었어. 웬 남자가 주간지를 팔려고 올라 탔는데 글쎄 대뜸 이모 얘기를 하지 뭐야. '가수 김추자가 과연 6월20일 결혼을 할 것이냐, 아니냐'하면서 약혼만 하고 공수표를 남발하는 연예인들 어쩌고 하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던데?"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잡상인의 말마따나 '가수 김추자가 과연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하는 이야기를 나도 여러번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약혼을 한 지가 이번 6월17일로 벌써 2주년 기념일 이었다. 보통 사람들도 약혼 기간이 길면 안좋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하물며 연예인이 약혼만 해놓고 꿩궈먹은 소식이고 보면 파경설이 떠 도는 등 뒷말이 많을 수밖에.
  사실 조금 더 미루고자 했던 우리의 결혼이 허겁지겁 6월 20일로 잡혀진 것도 약간은 그런데 이유가 있다.
  2년간의 우리의 약혼 기간은 '마음을 닫아도 부족함이 없고 마음을 열어도 더 들어올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은 것 같다.

물을 떠난 잉어

  74년의 대마초 사건은 순식간에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 나의 노래도, 명성도, 꿈도 모두 다... 당시에 난 그 별 것 아닌 것들을 잃고서 얼마나 못 견디게 괴로워 했었는지. 마치 나의 삶은 그것으로 끝인 양 울부짖었었다.
  그것이 천 배, 만 배 더 훌륭한 것을 내게 안겨 주리라고는 그 때 상상조차 못 했었다. 내게 삶을 알게 하고, 신앙을 찾게 하고, 무엇보다 우리 신랑을 만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정말 신께 감사한다. 내게 시련을 주셨음을..

  웨딩마치에 맞추어 걸어 나오는 신부의 뒤에서 '철커덕' 하고 지금 까지의 세계가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빛을 보겠지. 이제는 아무런 아쉬움 없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들을 낡은 사진첩을 정리하듯 기억해 보고 싶다.
  나는 연예인 중에서도 무척 화려한 생활을 했었다. 어느 하나 부족함 없고 아쉬울 것 없었다. 가는 곳마다 갈채와 환호가 기다렸었다.
  그러다가 74년 '연예활동 금지'조치는 내게 사형선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철없었던 나의 잘못이 저지른 결과이긴 했지만 나는 하늘을 원망했고 사람들을 저주하며 울부짖었다. 노래는 나의 호흡이었다. 금빛의 커다란 잉어가 어부의 그물에 걸려 땅으로 끌어 올려져 답답함에 파닥 거리다 결국은 죽어가는 꿈을 밤마다 꾸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다 하루 아침에 아무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것 같아 진공 상태를 어떻게든 빠져 나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씩 친해진 세상

  우선 춘천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약 4만평 정도되는 나의 농장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았다. 내리 쬐이는 뙤약볕 속에 검게 그을린 아낙들이 쭈그리고 앉아 한나절 내내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새까만 아이들은 발가벗겨진 채 맨발로 온 데를 쏘다니고, 웃통을 벗어 제낀 장정들도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만했고 세상을 전혀 몰랐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 갈채와 환호가 내 생활의 전부였었다.

  그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맛있게 먹는 과일을 위해서, 먹다가 배가 부르면 내버리는 것들을 위해서, 그렇게 땀을 흘린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 밭도 일구고, 가지도 치고, 열매도 따면서 조금씩 자연을 알고 차츰 세상을 알아갔다. 문득 내려쬐는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고 일하는 나의 모습이 뜨거운 조명 아래 온 정열을 다 쏟아 노래하던 과거의 나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것이 싫증나면 여행을 했다. 예정도 없이 길을 떠났고, 발 가는 대로 쏘다녔다. 온양, 유성, 도고, 덕산 온천 등 온천이란 온천, 범어서, 통도사, 직지사, 월정사 등 절이란 절은 모조리 들렸다. 때로는 어머니나 친고와 동행하기도 했으나 주로 혼자 떠나는 편이었다.

  차를 타고 훌쩍 길을 떠나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해졌다. 버스를 타면 나는 늘 버릇대로 눈을 감고 나의 과거 깊숙히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기억해낸다. 씹고 또 씹어서 이젠 쓴 물마저 우러나지 않는 기억들이지만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처럼 건드릴 때 마다 아팠다.  눈을 뜨고 창 밖을 본다.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몇채의 농가, 그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사람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코까지 골며 단잠을 주무시는 새까만 피부의 할아버지, 이들이 모두 조금씩 가깜게 느껴졌고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 내는 첫번째 과정으로 나는 할 수 있는데까지 나의 몸을 혹사했었다. 미친사람처럼 떠돌아 다니면서...

  지칠대로 지쳐서 모든 것을 탈진한 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과거의 화려했던 기억을을 되살려주는 서울. 그 곳엔 편안함과 넉넉함은 있었지만 무엇하나 만족스럽고 마음 붙일 것은 없었다. 며칠을 하는 일없이 뒹굴다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노래를 잃은 나는 날개가 잘린 새였다. 아무리 파닥대도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내게 한번만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줄 수 없나요? 날개를 돌려줄 수 없나요?  좌절감에 몸부림치며 나는 마치 구원의 줄이라도 잡으려는 듯 신앙을 찾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이기적인 생각이 신을 찾게 만든 것이었으나 그래도 신은 나를 받아 주셨다.

하느님은  정말 계시나요?

  그 때까지 나는 신앙이란 것에 별로 깊게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그저 절은 경치가 좋아서 여행지로 알맞고 교회나 성당은 성스러운 곳이라는 생각밖에는...
  하지만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셨다. 언젠가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쫓아가 본 성당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하얀 미사보의 신비로움이 머리 속에 남아있는 나는 성당을 찾기로 했다. 문득 명동성당의 엄청난 규모와 웅장함이 떠올랐다. 나는 엄제나 그런 식으로 우열을 가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명동성당에 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르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동네 구멍가게 아줌마는 가까운 성당이 어디냐고 묻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 보았다. 전혀 나 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내가 다니는 돈암동 성당이다.  나는 신부님을 만나 뵙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 속을 어지럽게 메운 많은 생각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신부님이 잠시 외출중이신데요. 집이 가까우면 집에 다셨다가 몇시간 후에 오시지요?"
  "아니에요, 수녀님.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그 수녀와 두시간 남짓 이런저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신앙으로의 첫발자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부님이 오셨다.
  "신부님 꼭 한가지만 여쭤보고 돌아가겠어요? 하느님은 정말 계신 건가요?" 

  나의 당돌하고 어이없는 질문에 신부님은 잠시 당황하는 것같더니 곧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생각하는 고민, 내가 앓고 있는 문제점을 다 알 것같다는 그런 미소를...
  그 날 신부님과의 대화 이후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설혹 내 마음에 의심이 생길지라도 믿자고, 무조건 믿어 보자고.
  월, 수, 금, 한 주일의 사흘은 교리공부를 위해 저녁나절을 항상 성당에서 보냈다. 그렇게 아장아장 걸음마를 내디딘 나의 신앙은 차츰 커가 석 달 후 1979년 12월 7일, 나는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아네스.

이젠 결혼할 나이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이었고 가장 고마운 변화였고, 시련이 가져다 준 가장 고귀한 열매였다. 그리고 그 때 즈음 내 인생에 있어 또 하나의 커다란 일이 생기고 있었다.
  "얘, 한번 만나봐. 네 나이가 벌써 몇 살이니? 친구를 봐라 벌써 시집 가서 안정돼있는게 부럽지도 않니? 그만큼 했으면 됐어. 뭘 그렇게 아직도 미련을 갖고 괴로워하니? 이젠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할 때야"
  딸만 다섯인 집안에 막?딸인 내게는 엄마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큰 언니가 제일 극성을 부렸다. 검찰청에 다니는 큰 형부를 통해 중매가 들어 왔단다. 그래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지금의 '우리 신랑' 이다.

  78년 가을 쯤이였는데 단시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는 '박경수 씨, 나이는 좀 많고 K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다 유학을 가서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박사과정 밟음. 경남 남해가 고향이고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위에 누나가 다섯계시는 외아들 현재 부산 동아 대학교의 교수'
  이 정도의 그의 이력 정도였다.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나에 대한 지식은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미국에서 돌아온지 4년밖에 되지 않는 그는 내가 대마초 가수였다는 것도, 가수 김추자가 어느 정도 수준의 가수였는지 조차 몰랐단다. 가수 김추자를 소개해준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레코드점에 가서 레코드판 겉장에 실린 나의 사진은 처음 보았단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의 노래를 들어 보았단다. 글쎄 그 때 나의 노래가 그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그건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가수 김추자.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기있던 가수' 이것이 나에 대한 그의 사전지식의 모두였단다.
  남들이 말하는 '화려한 연예인 생활' 가운데서도 외로움은 마치 그림자처럼 끈적하게 묻어 다닌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그러한 것을 느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생활,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 진실된 나와의 사이에 있는 휑한 공간이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검사, 교수, 의사 중에서...

  그러면서 나는 장차 나의 배우자를 꿈꾸어 보았다. 적령기의 처녀답게 수줍은 생각에 볼을 붉히기도 했다. 그 때 나의 이상형은 첫째가 검사, 둘째가 교수, 세째가 의사라는 전형적인 좁은 현대여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직업이 교수하는 사실이 어쩌면 나를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나는 하느님 앞에 장차 남편감은 검사, 교수, 의사 중에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었는데, 하느님은 이상하게도 나의 오만한 기도를 들어 주셨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기 조차 부끄럽다. 막상 교수 남편을 만난 지금에야 나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교수가 아니라면 하고 생각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가 교수이건 아니건 도대체 우리 둘의 만남에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의 첫 인상에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솔직히 고백하겠다. 날씬한 체격에 보기 좋게 드라이해서 넘긴 긴 머리카락에서 상큼하게 풍겨 나는 스킨냄새를 동경하던 내게 그의 첫 인상은 약간의 실망이었다. 그는 근엄한 표정에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고, 더구나 이마가 시원한(?)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것도 같았으나 15년간 미국에서 살다 나온 사람이라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르게 그에게는 느글느글한 버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이상한 것 같다. 내가 그분을 만나고 이제 그분의 아내가 되려는 현실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생각하면 신기하다. 내게 큰 시련이 없이 옛날의 가수 김추자 그대로 였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종합되고 조화되어서 인연을 만들어내고 인간으로 성숙시키는가 보다.
  그분은 그렇게 나의 이상형과는 다른 모습으로 찾아 왔지만 그 분을 만난 것은 확실히 나의 운명이었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주로 민속촌, 자연농원, 청평, 산정호수등 서울 근교의 유원지였다. 같이 다닐 때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그에게 부담이 될까봐 걱정스러웠는데 나중에 그는 그때 차츰 내가 어느 정도 인기인이었나를 깨달았다고 말해 주었다.

청평, 차안에서의 청혼

  그는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드는 사람이었다. 첫 인상에서 느끼지 못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를 표현하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지성과 야성을 함께 지닌 남자' 라고 말하겠다. 광고문안같이 유치한 단어이겠지만 그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그의 양면성 때문이었으니까.
  그는 한국가정의 외아들답지 않게 포용력이 있고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편자장도 팔불출에 끼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진실로 나는 문득문득 그에게서 놀라운 매력을 발견했으니까.

  6개월 쯤 만나고 나서 그가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 날 우리는 모터보트를 타기 위해 청평으로 갔었다. 그러나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모터보트는 포기해야만 했다. 차창 밖으로 쌩쌩 부는 바람이 괜히 스물스물 몸 속으로 배어드는 것 같아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때 그는 조용히 입을 열였다. 아마 이렇게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미 담신을 나와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당신께 청혼하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논리정연하게 또박또박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내용의 말을 그는 조금 흥분한 듯 더듬었던 것 같았다. 그 순간 이미 내 마음은 결정이 났었지만 선뜻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웃어른께 말씀드리고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나의 마음을 읽고 있었으리라.
  우린 물론 집에서도 대찬성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에 은근한 불안이 하나 있었다. 완고하고 봉건적인 그의 집안에서, 그것도 하나뿐인 며느리로 나 같은 대마초 가수를 받아들여 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부모님들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손윗 시누이가 다섯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열흘 후 나는 그에게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을 했다. 사실 열흘이란 기간은 내가 심사숙고 고민은 한 기간이 아니다. 달콤한 상상과 꿈에 들떠 있으면서 그에게 뜸을 들인 기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의 결정을 아주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고향에 내려가 시누이들을 만나 뵙고 나의 걱정은 깨끗이 풀렸다. 참 좋은 분들 이었고 의외로 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수 김추자로 대해주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신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커다란 시련 뒤에는 훌륭한 보상을 해 주신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사람으로 고민하고 결혼 문제로 좌절하는 예가 허다한데 나는 정말 일사천리로 일이 잘되어 갔다. 그를 만나기 이전에 미리 시련을 견디어 낸 자신이 자랑스럽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혼식

  1979년 6월 17일, 우리는 약혼식을 올렸다. 그 날 처음 그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참을 수 없었다. 정말 그는 너무 노래를 못했다.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했다.
  "아이들이 누구를 닮을지 걱정이야. 노래 실력만은 엄마를 닮아야 할텐데..."
  그도 껄껄 웃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 우리는 아이를 조금 많이 갖고 싶다. 한 네명 쯤... 그가 독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막내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같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의견은 또 일치했다. 그 중에서 설마 모두 아빠만 닮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고마운 일은 그가 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만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내게 시련이 없었고 기고만장한 인기가수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요즈음 젊음이들의 배금주의적 결혼관이 문제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상대방의 학벌, 집안, 경제력 등을 지나치게 따지고 그런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이미 인기가수가 아닌 나는 내 세울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내 자신을 받아들여준 것이다. 그도 이렇게 말했다. 가수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이 순진하고 순수한데 반했다고.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정말 드물게 복을 받은 연예인의 한 명이다. 또한 그것이 내가 받은 시련을 통한 가장 큰 획득이었다.

  1979년 12월 6일, 마침내 대마초 연예인들의 연예활동 금지조치가 풀렸다. 이미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5년이란 기간에 잉어도 어항에서 사는데 이미 길이 들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잉어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당신의 재능이 너무 아까운 것 같소. 결혼식을 조금  연기하더라도 다시 한번 당신이 활동을 하는게 좋을 것 같소."
  이러한 그의 배려 덕분에 몇 번에 걸친 리사이틀과 쇼를 성황리에 마칠 수가 있었다.

'뚱보'와 '박선생'

  약혼 후 나는 자주 부산에 내려가야만 했다. 동아대학교에서 적을 두고 그는 총장의 비서실장 일도 맡고 있어 항상 바쁘다. 그런 중에도 조금만 틈이 나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천성적인 방랑벽이 붙은 사람인지 온 데를 쏘다닌다. 고급호텔이 있고 사람이 붐비는 곳보다는 평범한 농가에서 토담의 흙 냄새를 맡으며 벌레울음 소리를 듣고 수북히 올려 담아주는 인정이 흠뻑 밴 밥상을 받기를 좋아 한다. 하다 못해 사진을 찾으러 갈 때나 약을 사러 갈 때에도 꼭 나를 데리고 간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은 '혹'이 되고 말았다.
  그는 유난히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장에서 뛰고 사우나 목욕을 한다. 나보고도 같이 운동을 하자고 극성이지만 나는 아침잠이 많아서 항상 그에게 사랑스런 불평을 듣는다.

  그가 나를 부르는 애칭은 '뚱보'이다. 나는 꼬박꼬박 '박 선생'이라 불러 주는데도 말이다. 하긴 요즈음 나는 조금 살이 쪘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그의 탓이다. 술, 담배를 안하는 그는 하루 세 끼를 꼬박 밥으로 그것도 순 한정식으로 찾는 데야 꼬박꼬박 준비를 해 주어야 하고, 그가 끼니마다 어찌나 맛있게 많이 먹는지 나도 꼭 따라 먹고 만다. 그는 1m 74cm에 72kg인 자신의 몸이 표준이라고 항상 자랑이다.

  에라, 살찌는 것도 복이라는데 어쩔 수 없겠지만 당장 웨딩드레스가 맞지 않아 고민이다. 예쁜 신부가 되기 위해 요즈음 안간 힘을 쓰다보니 눈이 빠꼼 들어가고 힘이 하나도 없다. 그가 옆에서 맛있게 먹지나 말았으면...
  이제 그는 마흔 살, 나와는 열 살 차이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문제랴. 우린 두 사람이 마음만 맞으면 못할 일이 없으리라는 자신이 있다. 5만원이건, 10만원이건 그가 타오는 돈으로 살림도 꾸려 나갈 각오가 되어있다. 이것도 우리가 아직 젊기 때문일까?

ⓒ 엘레강스 1980년7월호(글쓴이: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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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2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19) 추자의 전성시대 (신현준:한겨레신문)
 구미의 대중음악을 논하는 문헌을 보면 1960년대는 ‘좋은 시절’이었던 반면, 70년대는 ‘그저 그런 시절’이었다는 식의 평이 심심찮게 나온다. 경험과 실감도 부족하니 논평은 삼가자. 그런데 되돌아보면 한국에서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시절 다 갔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60년대 말까지 ..
2005-04-21 김추자,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의 연인 (최지선:컬쳐뉴스)
     최지선의 여성음악인 열전   김추자,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의 연인 소울․사이키 사운드의 ‘대중적’ 완성의 정점   2005-04-21 오후 2:11:38  최지선 _ 대중음악평론가]    &n..
2004-11-13 '무등산 타잔' '김추자' 등 실존 인물 영화 제작 붐 (조이뉴스24)
 조이뉴스24 | 기사입력 2004-11-13 14:53   무등산 타잔 박흥숙, 가수 김추자 등 실제 인물들의 삶이 영화로 속속 제작되고 있다. 이처럼 실제 인물들을 다룬 영화가 잇따라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꾸미지 않은 강력한 드라마가 매력적이며 그들의 인지도가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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